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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AP

Ethnography is One thing. Designing is Another.

by Stan1ey 2008. 3. 6.

오래간만에 시내에 -_-;;; 갔다가, 화장실에서 재미있는 물건을 발견했다.

Paper towel dispenser

화장실 입구에 걸려있는 종이타월 dispenser 인데, 일반적으로 채용되어 있는 옆쪽의 레버도 없고 외국에서 볼 수 있는 다이얼도 찾을 수 없어서 잠시 패닉. -0-;;;

그런데 한복판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또 이렇다.

Paper towel dispenser: Close up

.... 에? .... 아아아.... ㅡ_ㅡ;;; 팔꿈치 아래, 정확하게는 하완부로 레버를 내리면 종이타월이 안에서 나오는 방식이다. 오마이갓. 순간 엄청나게 많은 장면들이 눈 앞을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의욕이 넘치는 제품 디자이너, 보다 좋은 사용성을 제공하기 위해서 종이타월 dispenser를 사용하는 모습을 화장실 구석에서 눈을 반짝이며 관찰한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손이 젖어 있기 때문에 팔꿈치로 레버를 내리는 모습을 보고 무릎을 친다. 그리곤 회의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사용자들이 팔꿈치로 레버를 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용자들이 팔꿈치로 레버를 내려야 하는" 물건이 생겨나고, 이 훌륭한 "디자인 의도"를 계몽하기 위해서 팔꿈치로 레버를 내리는 일러스트레이션이 추가된다. "이 제품을 실제 사용행태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굳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라고 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실제로 제품에는 한 구석의 회사 로고 외에 문자정보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시니컬한 시각을 가진 다른 UI 디자이너, 즉 내가 경험한 모습은 이렇다. (아래는 다른 화장실에서 찍은 모습이다)

Paper towel dispenser: Cynical Point of View

Paper towel dispenser: Cynical Point of View

사실 처음 봤을 때는 위의 사진에서처럼 타월이 나와있지 않았는데, 앞 사람이 나와있는 타월을 뜯어간 후에는 그게 일반적인 모습일 것이다. 저 벽에 붙어있는 물건은 종이타월을 줄까? 건조한 더운 바람을 줄까? 아니면 기저귀를 갈 수 있는 테이블을 줄까? 전혀 힌트가 없는 가운데, 짙은 남회색의 반투명 재질은 어두운 화장실에서 볼 때에 내부에 뭐가 있는지도 드러내지 않는다.

우선 아래에 손을 내봤지만 아무 동작(건조기를 예상했었다)의 기미가 없어서, 종이타월인가 하고 조작부를 찾았지만 쉽게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눈 앞의 조작부를 찾지 못하는 바보가 나 뿐은 아니었는지, 이 경우엔 "사용시 이곳을 눌러주세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어떤 사용자는 실제로 저 그림을 버튼처럼 ㅡ_ㅡ;;; '누르고' 있었다! ) 결국 그림의 해독이 끝난 후에 - UI 종사자로서의 예의로 - 팔꿈치를 들어 레버를 내려보려는 순간, 레버에 물이 흥건한 것을 보고 참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많은 다른 사용자들은 레버를 찾자마자 이해하지 어려운 일러스트레이션을 해독하기를 포기하고 손으로 레버를 내린 것이고, 그렇게 물이 묻은 레버를 팔꿈치로 내렸다가는 옷이 젖게 되므로 다음 사람도 손을 선택하게 되는 거다.


... 이 제품을 디자인한 디자이너에게는, 특히 그 분이 실제로 위의 시나리오처럼 관찰기법 ethnography 을 정규적이든 우연히든 적용해서 디자인한 거라면 정말 박수를 쳐주고 싶다. 실제로 그런 상황을 잡아내는 디자이너도 많지 않을 뿐더러, 그걸 실제 디자인에 적용하는 사람은 더더욱 많지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현장 관찰에서 발견된 성과 역시 100%의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됐다. "팔꿈치로 내리는" 장치가 아니라, "팔꿈치로 내려도 편한" 장치여야 했던 것이다. 이건 어떻게 보면 universal design 의 논점과도 비슷한데, 나이 많은 사용자를 위한 제품이라고 해서 "노인에게 편한"이 아니라 "노인이 써도 편한" 제품을 디자인해야 하는 것과 같다.

결국 ethnography 는 방법일 뿐이고, 결국 잘 design 한다는 것은 그것과 상관없이 여전히 어려운 과제인 것 같다. 좋은 디자이너는 나를 버리고 남을 받아들이되 내가 남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조차 버리고... 무슨 선종의 가르침 같지만 말이다. -_-


뭐 이래저래 군시렁 거리고는 있지만, 솔직히 이만큼 UI에 대해서 신경을 써준 좋은 디자인과 디자이너를 '만난' 날은 기분이 좋다고 하면 때늦은 변명이 되려나. ^^;


P.S. 참고로, 위 사진들은 종로 3가 단성사 건물의 3,4층 화장실에서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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