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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 eXperience

Loss of UX Innocence

by Stan1ey 2012. 12. 4.

오래간만.


이 블로그에서는 사용자 경험(UX) 디자인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정확히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에 대해서 이래저래 고민을 아주 간간히 해왔다. 워낙 모호하고 당돌하게 정의되어 있는 분야다보니 결국 직접 손을 움직이고 발로 뛰어야 하는 귀찮은 작업(그래픽, 개발, 영업 등)은 빼고 머리로 하는 일은 모두 내꺼얌~이라는 식이 되기도 하고, 정의라는 것도 기존에 디자인이 예술로부터 스스로를 구분했을 때나, UI 디자인이 제품 디자인(혹은 소프트웨어의 그래픽 디자인)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분했을 때나, 정보설계(IA) 분야가 UI 디자인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자 했을 때와 별 차이가 없는 게 마땅찮았던 것도 사실이다.


“작가 자신이 아닌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를 고객으로” 디자인한다거나 “단지 보기 좋은 제품이 아닌 사용하기 좋은 제품”을 만든다거나 “표면적인 편의성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깃들어있는 편의성”을 추구하는 것은 지난 수십년간 어느 순간에도 “잘 만들어진 물건”의 기준이었을 텐데, 늘 이런 잣대를 들고 나와서 편가르기를 하게 되는 건 왜일까.


나름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의 진정성(authenticity)을 그 사용자 경험의 구심점으로 생각해보기도 하고, 기능이나 과업 중심이 아닌 경험 중심의 디자인을 고민해 보기도 했지만, 언제나 쳇바퀴 돌 듯 결론은 늘 똑같았다.

  • 사용편의성 향상과 사용자 경험 창출은 서로 다른 분야로, 전자는 엔지니어링에 가깝고 후자는 의사결정에 가깝다. 요컨대, 둘 다 뭔가를 디자인하는 작업은 아니다.
  • 이상적으로 말하는 사용자 경험 디자인을 하려면, 디자이너라기보다 감독이 되어야 한다.

그러던 중, 얼마전에 Mind The Product라는 이벤트를 알게 됐다. 학회라면 학회랄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그냥 관심을 공유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의 모임인 듯. 이 모임의 모태가 되는 Product Camp라든가 우후죽순처럼 퍼져가고 있는 지역별 소모임 Product Tank도 크게는 이 이벤트를 구심점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Mind The Product는 지난 10월에 런던에서 첫 모임을 가졌는데, 그 후폭풍이 좀… 심상치 않다.


Mind The Product


이 모임은 제품 관리자(product manager)들의 모임이다.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어내던 시절의 생산 관리자(production manager)가 아니라, 제품 그 자체를 관리하겠다는 사람들이다. 위키피디아에 정의되어 있는 제품 관리(product management)라는 분야는 다소 광범위해서, 우리나라 회사에서는 상품 기획이나 서비스 기획으로 부를법한 내용은 물론이고, 마케팅 업무에 개발 과정까지도 언급하고 있다. 애당초 Product Camp라는 모임이 그 대상 중 하나로 마케터를 명시하고 있었고, 위키피디어의 제품 관리 페이지도 초창기에는 프로젝트 관리를 포함하고 있었으니 이 분야들 사이의 혼동은 뭐 새로운 분야가 정체성을 찾아가는 당연한 과정이라고 하겠다.


그러다가 지난 1년여 동안 눈에 띄게 활발해진 이런저런 모임들과 Mind The Product 이벤트를 통해서, 제품 관리라는 분야가 확실히 자리를 잡아가는 느낌이다. 최근 가장 흔하게 인용되는 제품 관리의 정의는, Marty Cagan이라는 사람이 지은 <Inspired : How to Create Products Customers Love>라는 책에 나온 “to discover a product that is valuable, usable and feasible”라는 문구와 Martin Eriksson이 Mind The Product  블로그에 올린 아래의 도표다.


Positioning product managers


… UX 디자인의 큰 그림과 역할을 고민해온 사람들은 위의 정의나 그림을 보면 조금 착잡한 마음일게다. 어떤 사람은 가까스로 사람들이 사용자 경험의 가치에 대해서 알아주기 시작하니까 군식구가 느는구나...라고 생각하기도 할테고, 어떤 사람은 집안에서 밥그릇 싸움을 하는 중에 외적이 몰려왔다고 생각하거나, 반대로 회사 조직 내에서 사용자 경험을 잡아나가는 데에 큰 우군이 생겼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아니면 심지어 자신이 생각하던 범위의 업무에는 UX 디자인보다 제품 관리가 더 맞는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위에서 기술하고 있는 제품 관리의 역할은 바로 몇 년전까지만 해도 사용자 경험 디자인이 맡아야 할 역할이라고 성토하던 바로 그 영역이다.


실제로 지난 Mind The Product 이벤트의 발표 내용은 대부분 “어떻게 하면 좋은 사용자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에 대한 내용이었으며, 무엇보다 그걸 디자인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제품 관리와 사용자 경험 디자인이라는 두 분야는, 적어도 내가 보기엔, 동일한 역할을 두고 내려진 서로 다른 정의일 뿐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제품 관리는 조직 내에서 프로젝트의 운용과 진척 관리에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top-down으로 생겨난 분야이고, 사용자 경험 디자인은 제품을 설계하는 사람들이 그 영향력을 넓혀 보다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bottom-up으로 만들어낸 분야라는 것이 다를 뿐.


어떤 식이든 간에, 한 번도 제대로 정의된 적이 없는 이 UX 판에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지만) 시어머니 역할을 하겠다고 나선 일군의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이제까지처럼 좁디좁은 디자인 바닥에서 노른자를 내놓으라며 “알박기”나 “편가르기”를 하던 패들과는 조금 다른 종자들이다. 애당초 제품 개발 프로젝트를 어떤 식으로 운용하고 거기에 포함된 인력들을 어떤 식으로  관리하면 좋을지에 대한 방법론과 이해가 있는 사람들이다. 또한 이 사람들은 조직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라면 디자이너보다 축적된 경험이 더 많은 분야이고, 경력자들이다.


물론 제품 관리자들도 사용자 경험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십분 동감하고, 이를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UX에서 UX 디자이너의 역할은 기존에 소위 “UXer”들이 주장하던 슈퍼히어로의 모습이 아니다. 제품과 서비스와 나아가 회사의 비전까지도 하나의 사용자 경험으로 디자인되어야 한다고 활개치던 모습은 더이상 없고, 개발 중인 제품/서비스에 대해서 최적의 사용자 경험을 제시하기 위한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그 사용자 경험을 조직 내의 사업 목표나 기술적 역량과 조율하는 거시적인 역할은 제품 관리자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게다가 저 위의 정의를 보면, UX의 역할이라는 것도 "usable", 즉 전통적인(?) 사용성 향상의 역할로 다시 돌려보내지는 느낌이 없잖아 있는 것이다.


UX Man, a superhero?Courtesy of Axure.com


“사용자 경험 디자인”이라는 분야는, 지난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자신의 분야를 제대로 정의하지 못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전에도 언급했듯이 “무엇이 사용자 경험 디자인이 아닌지”를 정의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아마 자신이 원래 하던 분야 – 실무로서의 디자인 – 와의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아무리 큰 그림과 사용자 경험 시나리오를 이사진과 토의한다고 해도 결국은 아이콘 모양이나 색상에 대해서 한마디 거들지 않을 수 없고, 와이어프레임 치는 업무를 배제해 버리기엔 뭔가 역할이 모호했던 것이다. 이제 무언가를 직접 디자인하는 데에 대한 집착이 없는 사람들이 나타나 의사결정의 상부에서 조율과 관리를 “전문적으로” 전담하겠다고 한다.


이 두 가지 분야들 사이의 역학관계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게 될까? 조직의 규모에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 고삐를 쥐어줄지가 달라지게 되지는 않을까? 굳이 두 분야를 다르다고 규정하고 싸우기보다, 두 분야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부분을 재정의하고 통합하게 되지는 않을까? 뭐 앞으로 1-2년 동안은 어떤 식으로든 대세가 결정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렇게 된다면 지난 십수년간 그 가치만 높아지고 정작 그 주도권은 공석으로 남아있던 사용자 경험이라는 분야도, 조금은 더 명확해지리라고 생각한다. UX 디자인 분야의 많은 사람들이 기대해온 그림보다 커지게 될지 줄어들게 될지는 두고봐야 하겠지만.




참으로 오래간만에, 그것도 뭔가 문제꺼리가 많은 글을 툭 하니 던져놓고 참으로 참으로 면목없는 말씀이지만, 당분간 이 블로그에 새 글이 올라오기가 힘들게 됐다. 티스토리에 실명등록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한국 휴대폰을 통해서 인증을 해야 한다는거다. 아니면 여권사본을 보내라나 뭐라나… 귀찮은 해외 블로거는 올 연말부터 새 글 등록을 못 하게 됐다. 언제 한국에 가게 되면 만사 제쳐놓고 실명등록부터 해야지. (그래봐야 쓰는 글이 있어야 새 글이 등록되겠지만서도.)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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