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의 CHI 2008에서는, 이전 연도에서는 볼 수 없었던 유별난 모습이 하나 있었다. 이전까지 말그대로의 전문분야 - HCI - 에만 집중해왔던 모습과 달리, 다음과 같은 웹페이지를 따로 개설해서 "지속가능성 Sustainability"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컴퓨터 상호작용(HCI) 학회에서 환경을 생각해서 이만큼의 뭔가를 주장한다는 건 사실 나에게 기이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가 차라리 전산/전자공학회여서 슈퍼 컴퓨터에 사용되는 전원을 줄이거나 발열량을 줄인다거나 한다면 모를까, HCI 혹은 UI가 환경을 위해서 뭘 할 수 있을까?
게다가 저 홈페이지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학회에서 발표된 "Go Green"하기 위한 노력이란 것도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 앞으로 CHI에서,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논문을 쓸 수 있다.
- 학회장 한켠에서 환경을 주제로 한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 학회 개최지에서 생산된 음식(local food)와 썩는 플라스틱 용기를 쓴다.
- 논문집에 재생지를 사용했다.
- 학회에서 나눠준 가방을 모아주면 필요한 곳에 기증하겠다.
- 학회장 어디에서나 종이/유리/깡통을 분리수거할 수 있도록 했다.
그외에도 학회가 참가자들에게 택시보다는 버스를, 차량보다는 걷기를 종용하는가 하면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서 머그잔을 들고 오라는 소리까지 하는 걸 보면서, 사실 CHI 학회의 앞날에 대한 고민을 꽤 심각하게 하기까지 했다.
그로부터 몇개월 후, 다름 아닌 이번 7/8월호 <Interactions>지의 머릿기사에서 이 지속가능성을 다루는 것을 보고, UI 디자이너로서 이 지속가능성이라는 주제를 좀 더 심각하게 고려하는 것이 소위 식자들의 대화에 끼는 데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싶어서 찬찬히 읽어 보았다.
결국 Usability와 Sustainability 사이에도 고리는 있었던 셈이다. ㅡ_ㅡa;;
이 기사 - Changing Energy Use Through Design - 에서 주장하는 바는 다음 한 인용문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 Nonetheless, no matter how efficient an interactive product maybe, a large portion of energy consumed by a digital product is often governed by user behaviour.
언뜻 들으면, 아항~ 싶기도 하다. 즉 우리 UI 디자이너들이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에너지 소모가 적은 사용자 행동패턴을 유도하는 그런 UI를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Sustainability-friendly design과 Usability-friendly design이 평행선을 그릴 수 있을까?
이 기사에서 주장하는 내용(사실 상세한 항목들은 뜬구름과 갖다끼워넣기의 극치를 보여주는지라 인용하고 싶지도 않다)은 십수년 전의 universal design의 모토를 떠올리게 한다. 사회적 약자들이 편하게 쓸 수 있는 디자인이 결국 궁극적인 편의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렇게 디자인된 제품은 일반 대중에게도 그 '편의성'을 상업적인 수준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이상을 (나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universal design의 이상은 몇가지 사례만을 제외하고는 그닥 현실성을 증명하지 못하고 말았고, 그때처럼 "Sustainable UI"도 - 이런 용어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 그런 환상을 열정적인 학생들에게 잠시 주입시키고 회사 입장에서는 의미 없는 포트폴리오를 양산하게 하다가 말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든다. (혹은, 내가 '사회생활'을 너무 오래 한 것일까? @_@;;; )
그나마 universal design 개념을 자의든 타의든(?) 적용하여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제품들은, 사실 디자인 본연의 관점에서 볼때에도 훌륭하고 완성도 높은 스타일링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그 성공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Sustainable UI를 통해서 등장할 성공적인 "스타일링"은 뭐가 될까? 자연주의적인 재료선택이나 Zen 스타일, 혹은 최악의 시나리오로는 20년전의 "Green Design"의 부활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어느 것도, 사실 Usability와는 그다지 궁합이 맞을 것 같지 않으니 UI 디자이너들 한동안 참 머리 좀 아프겠다. 한동안 전산학에서 던져주는 주제를 따라서 유행을 만들고 그 안에서 헤매고 하더니만, 이젠 인문학으로부터의 주제에도 이렇게 휘청휘청하니 이를 어쩌면 좋으냐... ㅡ_ㅡa;;;
P.S.
사족으로, 위 <Interactions>지의 기사와 전혀 다른 방향이지만 내 생각에 진짜 Sustainability와 Usability의 결합을 시도했던 한 연구를 소개한다. 이 논문 - Energy-aware User Interfaces: an Evaluation of User Acceptance - 은 2004년 CHI에서 발표된 HP Labs의 연구로, 어떤 종류의 평판 디스플레이(이를테면, OLED나 PDP가 그렇다)는 검은색 픽셀을 표시하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데에 착안해 다음과 같은 스크린들을 제안하고, 사용자를 대상으로 수행한 수용도 acceptance 조사를 보고했다.
이 연구에서 제시된 화면 중 어떤 것은 분명 좀 오바한 측면이 없지 않고, 연구자들도 발표 중에 위 Fig.3을 보이면서 "이런 화면은 배터리가 거의 떨어져 간다든가 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나 쓰일 것"이라고 부언한 기억이 난다.
비록 이 연구가 대단한 지속가능성의 철학을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휴대기기의 배터리 수명을 화면을 꺼서 늘려보자"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내 생각에 만일 Sustainability와 Usability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공로는 이번의 <Interactions>지 머릿기사가 아닌 이 HP Labs의 연구원들에게 credit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P.S.
그래도 Sustainability를 연구하는 친애하는 후배들은, 이런 나의 독설에 휘둘리지 말고 꼭 '우리 디자이너가 진짜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기를 바라는 것도, 내 솔직한 심정이다. (알았지? J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