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그림은 1990년 편집 디자인 잡지 <Print>의 표지로 등장해서 한동안 꽤나 입에 오르내렸던 픽토그램이다. 직업별로 자는 사람의 모습을 표현하면서 나름 풍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디자이너가 자는 모습(?)은 맨 끝에 표현되어 있다.
... 디자인이라는 직업은 참으로 개떡같은 특징을 하나 가지고 있다.
"모던하면서도 매력적인", "직관적이면서 구태의연하지 않은", "아이폰만큼 좋지만 아이폰과는 차별화되는" ... 누구나 알고 있는 이상적인 디자인은 구체적이지 않으면서도 참 쉽게 이야기되는 반면, 정작 그걸 흠잡을 데없이 구현해내야 하는 책임은 오로지 디자이너 혹은 디자인팀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디자인이라는 게 아무나 할 수 없는 전문 분야라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는 듯 하면서도, 디자인을 평하는 것에 대해서 만큼은 아무도 망설이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디자인이 예술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런 상황에 대해서 불평한다는 것 또한 프로답지 못하다.)
결국 이 직업은, 어떤 현실적이고 확실한 정량적 기준이 있어서 그 조건을 충족하면 되는 게 아니라, 그저 한없이 높기만 한 이상론을 현실적인 요구사항들 속에서 해내야 하는 게 일상이다. 게다가 다른 디자이너들은 그 이상을 왠지 이루어 버린 듯한 한데, 서로 다른 주변 여건을 핑계 삼기는 좀 심하게 민망하다. ... 무엇보다 내가 처한 여건이 완벽하지 않다는 건 사실일런지 몰라도, 앞서 멋진 결과물을 내놓은 디자이너의 여건이 어땠는지는 순전히 상상에 불과하니까.
학생때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꾸듯이, 내가 천재 디자이너라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보통의 디자이너와 보통의 디자인팀들이 이상적인 디자인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려면 절대적으로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필요하다. 주어진 디자인을 몇번이라도 토론하고, 검증하고, 고민하고, 다듬는 과정을 통해서 좀 더 심도있는 디자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 속의 디자인 작업은 쏟아지는 요청에 대응하기도 바쁜 상황.
물리적인 작업 시간이 빠듯한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면 디자인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까? 답은 "선택과 집중"에 있다. 디자인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에 집중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그러기 위해서 나머지 부분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현실적인 한계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해결 방안이 필요한 것이다.
이번에 UX 디자이너 박지은님과 함께 번역을 마쳐 출간한 책 <웹사이트 해부하기>는 바로 이 "선택과 집중"에 대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랙션 디자인 프레임워크라는 개념을 주창하고 있는 원 저자는 그 장점을 이것저것 나열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와 닿았던 부분은 반복되는 디자인 업무에 대해 효율을 높임으로써 중요한 부분을 디자인할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는 점이다.
어느 정도 규모의 디자인팀이나 경험 많은 디자이너라면 이미 어떤 식으로든 나름의 디자인 패턴을 관리하고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인터랙션 디자인 프레임워크"는 디자인 패턴의 확장된 개념으로, 사용자 인터페이스 요소 하나하나의 차원이 아니라 사용자 경험의 차원에서 디자인 작업을 관리하고 공유함으로써 디자인에 필요한 시간을 줄이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게 효율적으로 처리한 디자인 작업 덕택에, 프로젝트에서 독창적이고 재미있는디자인을 필요로 하는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시간을 투자하고 많이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 우리네 솔직한 현실로는, 그 남는 시간에 천재적인 발상이 떠올라 좋은 디자인이 나온다기 보다 그저 제때 퇴근해서 내 침대에 누워 누워 잘 수 있는 기회가 좀 더 늘어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 그렇게 행복한 디자이너라도 만들 수 있다면, 그 또한 의미있는 "선택과 집중"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행복한 디자이너가 행복한 UI를 만드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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