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공서에 가는 것은 언제나 큰 도전이었다. 마치 어떻게 하면 사용자 중심 디자인에서 멀어질 수 있는가를 열심히 연구한 듯, 일단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행정용어'로 뭐라고 하는지 부터 알아야 어디로 발걸음을 옮겨야 할지 알겠는데, 사용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모르는 한자어에 약자 투성이인데다가 '그것도 모르냐'는 고자세의 공무원들에게 압도되는 건 기본, 복잡한 서류 채우기를 진땀 흘리며 하다보면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벌을 받나 싶을 때도 있는 것이다.

이런 경험들은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인지, 여기서 만들어진 이야기인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에서도 "은하계에서 가장 역겨운 종족"이라는 보곤족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그런 모습을 속속들이 풍자하고 있다.

Bureaucracy in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Bureaucracy in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

결국 그 날이 오고야 말았다. 이제 새 집을 구했으니 법적인 거주지로 등록하고 세금을 내겠다고 신고하러 가야 했던 거다. ㅎㄷㄷ.

그런데 정작 찾아간 시청 창구에는 우리나라처럼 뭔가 채워야할 양식이 잔뜩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번호표만 뽑아서 기다리게 되어 있다. 기다리다가 가라는 창구로 가서 앉아보니 바로 옆에 눈에 확 띄는 안내문들이 붙어 있었다.

Accessibility for All, beside Administration Office Agent

왼쪽 위의 안내문은 눈이 안 좋거나 해서 글자가 크게 인쇄된 안내문이 필요하면 요청하라는 내용이고, 오른쪽의 것은 영어를 못할 경우 -_-;; 필요한 언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전화통역사를 통해서 관공서 서비스를 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어는 왼쪽 맨 아래에 있다.) 여러가지로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인다.

게다가 뒤쪽의 기둥에 붙어있는 포스터들에는, 동성커플과 청각장애인을 위한 안내문까지도 붙어있었다.

Accessibility for All, beside Administration Office Agent

... 뭐 이런 걸 가지고 일일이 감동하기도 지쳤다. 이제 슬슬 오버라는 생각도 들고. 그러니 그냥 뭐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려는데, 정작 나를 담당한 agent 아줌마가 이것저것을 물어보면서 자기가 서류를 작성하는 걸 보고 그만 감동해 버렸다. ;ㅁ; 공문서라는 게 내가 직접 작성하지 않아도 되는 거구나!!! 사실 나보다는 담당자가 훨씬 더 잘 알테고, 그럼 내가 나 편한대로 이야기하면 공무원이 형식에 맞게 채워넣는 게 효율적이라는 건 당연지사. 실제로 내가 주소를 이야기하니까 그게 공문서에서는 이렇게 적는 편이 더 정확하기 때문에 이렇게 바꿔 적습니다..라고 설명해 주기까지 했다.

신고절차를 마치자 내가 내야 할 세금이 얼마인지를 바로 계산기 두들겨가며 설명해주고, 어떻게 내는 방법들이 있는지를 설명한 후에 같은 내용을 우편으로 다시 보내기로 하고 돌려보낸다. 와... 한국에서는 내 돈을 내고 상담을 받을 때에도 이렇게 눈높이를 낮춰주는 '전문가'를 본 적이 없다. ㅡ_ㅡa;;;


창구 옆에 쌓여있길래 집어든 안내문도 이런 관점에서 아주 흥미롭다.

MONEYmadeclear leafletMONEYmadeclear leaflet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관공서에 쌓여있지만, 경고로 가득한 정책 설명이나 전문용어 투성이 법규의 나열도 아니고, 표지에 적혀있듯이 상품을 팔려는 홍보물도 아니다. 마치 초등학교 참고서마냥, 돈을 아끼는 방법을 쉬운 말로 조목조목 적고 있다.

이 문서를 만든 것은 FSA(Financial Services Authority)라는 회사인데, 분명히 .gov.uk 주소를 가지고 있으면서 스스로는 재무 서비스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는 회사라고 정의하고 있다. 뭐 이건 별로 상관없을 것 같으니 넘어가자. 위 소책자는 이 회사의 MONEYmadeclear 라는 홍보전략(?)의 일환인 듯 한데, 이 캠페인 웹사이트를 가보니 더 멋지다.

MONEYmadeclear website

단어 하나하나에 어찌나 공을 들였는지가 보이는 웹사이트다. IA나 GUI에 신경을 많이 쓰는 웹사이트는 많이 늘었지만 글로 적힌 내용에 이 정도 공을 들였다니 참 대단하다 싶다. 특히 저 위의 소책자에는 "from Financial Services Authority"라고 되어 있는 부제가, 웹사이트에는 "from the UK's financial watchdog (FSA)"란다. 자기 이름까지도 어려우면 쉽게 바꿔주는 센스. 다른 곳에서는 생전 찾아볼 수 없는 한자어로 복잡하게 만들어놓고 게다가 약자로 부르면서 그것도 모르냐는 어디의 누군가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_ㅜ

(참고로 위 웹사이트에서는 내가 집어온 것 외에도 다른 시리즈 소책자를 PDF로 제공하고 있다. 기껏 어렵게 찍어서 올렸으니 그냥 두련다. 자세한 내용은 다운로드할 수 있는 PDF 파일들을 참고하시길.)



물론, 우리나라도 많이 변했다. 이제 "구정도 서비스"라는 주장도 하고 있고 (하지만 여전히 구정 - 구 행정(?) - 이라는 자기만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대민 서비스"도 (대민 -_-; 어디서는 tax payer인데 어디서는 백성이다) 많이 개선하겠다고 하는가 하면, "민원 처리"(처리해야 할 민원? ;ㅁ; 떼쓰러 온 것 같잖아) 프로세스를 간략화 하겠다는 기사도 봤다. 하지만 뭐랄까 그런 말부터 속보이는 전시행정 말고, 진짜 성심껏 몸을 낮춰주는 이런 자세는 어떻게 배워갈 수 없을까? (배워 가겠다고 윗분들 우르르 놀러 오라는 뜻이 아니다. -_-=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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