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S

2010. 6. 27. 03:43
회사에서 UI 디자이너라는 걸 하다보면 가장 어려운 것은, 혼자서 만드는 사람의 창조 본능과 싸우고 있는 듯이 느껴질 때다. 상품기획이나 마케팅의 입장에서는 뭔가 기능을 잔뜩 넣어야 많이 팔린다고 (혹은, 팔기 쉽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하드웨어든 소프트웨어든 개발하는 입장에선 일단 들어간 기술로 가능한 기능은 모두 집어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듯 하고, 심지어 시각적인 측면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왠지 자아실현이 목표인 것처럼 보일 때조차 있다. 다들 뭔가 하자는 게 많아서 싸우는 와중에, 그것도 거기 없는 사람(사용자)를 대변해서, 그 쓸데없는 기능 좀 그만 넣고 단순하게 만들자는 말을 꺼내기란 참 곤란한 일이다.

KISS... Keep It Simple, Stupid. 이 말이 원래 UI 디자인이나 사용성 공학 쪽에서 나온 건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이 분야에서 심심찮게 인용되는 경구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이폰이 좋은 UI.. 혹은 UX의 사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다소 무리해서 단순화시킨 기능구조 덕택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난데없이 이 경구가 떠오른 것은, 이 동네에서 가장 큰 소매업체인 TESCO에서 휴대폰 판매를 시작하면서 내보낸 일련의 TV 광고를 보면서다.

TESCO Mobile - Simple Tariff

테스코가 휴대폰 판매를 시작한 건 2003년부터라고 하지만, O2와 손잡고 따로 법인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뛰어든 게 2007년. 그리고 마침내 공격적인 마케팅을 시작한 2009년은 애플에서 iPhone이 그 감성적인 Touch UI로 한창 인기를 끌고, 새로 나온 Palm Pre는 다음과 같은 광고를 하고 있던 시기다.



휴대폰은 더없이 개인적인 기기이기 때문에 이런 감성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이것이 바로 UI를 뛰어넘는 UX의 경지"라면서 너도나도 감성적인 스토리텔링을 도입하기 시작했고(이런 광고는 우리나라로 치자면 1999년 TTL 광고 캠페인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해도 될 듯), 이미 일찌감치 그런 관점을 받아들였던 광고계에서는 이런 광고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모두가 사용자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서 정말 고민 많이 하고 돈 많이 들여서 찍은 광고들이다. 돈을 긁어모은다는 휴대폰 통신사업체간의 경쟁이니만큼 한달에도 몇건씩 명작이랄 수 있는 광고가 튀어나왔다. 사실 위의 동영상들은 모두 내가 참 좋아하는 광고다.

이런 피바다(red ocean)에 뛰어들려니 테스코도 고민이 꽤 많았는지, 맨 처음으로 TV에 방영한 광고는 다음과 같다.



요컨대, 통신업계에서 인지도가 떨어지는 걸 솔직히 인정하고 요금제에 큰 혜택을 줘서 손님을 끌겠다는 거다. 솔직담백.

테스코는 우리나라로 치면 이마트 정도 되려나. 생필품 브랜드를 자체적으로 만들기까지 하면서 유통마진을 최소화하고, 광고마다 최저가를 내세우고, 따로 적립카드를 만들어서 적립된 포인트를 현금처럼 쓸 수 있게 하는 체인이다. 소매시장에서 최종 소비자를 가장 가까이에서 대하는 업체답게, 테스코는 최종 소비자가 원하지만 기존의 휴대폰 판매업자들이 채워주지 못하는 게 뭔지를 나름의 시각으로 열심히 고심한 모양이다.

몇개월 후, 테스코 모바일의 시리즈 광고가 시작됐다.





4~5개월 간격으로 방영된 이 세 편의 광고(세번째 광고는 TV에 방영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됐다)에서 하는 말은 똑같다. 앞의 동영상들에서와 같이 "감성적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그 브랜드만의 "사용자 경험(UX)"을 유도하려는 노력들이 까놓고 말해서 헛소리(nonsense)라는 거다. 광고를 보는 순간에야 화려한 영상과 유려한 말발에 멋지다고 혹할런지 몰라도, 실제로 구매를 해야 하는 순간에 필요한 건 그런 감성적인 만족이 아니라 실질적인 가격 대비 효율이다... 아마 그런 소리를 하고 싶은 것 같다.

...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사용자가 필요한 기능과 자세와 동선을 연구해서 정말 사용하기 편리한 냉장고를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게 실제로 냉장고를 파는 데에 도움이 될까? 유니버설 디자인을 내세워 일반인은 물론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만들 수는 있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실제로 이용하려고 할까?

사실 UI 디자인계의 이런 고민을 해결(라고 쓰고 '회피'라고 읽는다)하려는 게 소위 UX라는 접근이었고, 사용자에게 물리적인 효율성 이상의 만족감을 주기 위해서 감성적인 디자인(emotional design)이라든가 스토리텔링을 통한 브랜드의 전체 경험 제공(자주 이야기 되는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의 가치가 어쩌구 저쩌구)이라든가 하는 거 였다. 그런데 그렇게 어떻게든 재정립해 보고자 하는 새로운 방식에 대해서도, 또 이렇게 뼈아픈 지적이 들어오는 거다.

물론 어떻게 생각해보면, KISS를 부르짖고 있는 위의 TESCO Mobile의 광고들도 결국은 또 한 가지 방식의 스토리텔링이고, 나름의 방식으로 감성적인 소구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좋은 UI"나 "좋은 UX"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해서 세상을 구하리라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건 사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랄까.

거참. 마치 아주 오래된 악몽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다.

UI도 UX도 결국은 부가가치... 뭔가 핵심가치를 제공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 자체를 버려야 하려나. ㅡ_ㅡa;;;
Posted by Stan1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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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6.27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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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bought this iPad and in my opinion,it's all about UX. What do u think about it? :$
    • 2010.06.27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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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게 UX인 것 같기도 한데, 정작 그 UX라는 걸 특정할 수 없다는 게 제 고민입니다. iPad(혹은 다른 i시리즈들)의 장점/매력/세일즈포인트가 뭘까요...

      > 사용편의성: 간단한 기능에 최적화되고 군더더기 없는 정보구조
      > 사용감: 터치 입력을 십분 활용한 매력적인 GUI(애니메이션 포함)
      > 컨텐트: 쉽게 획득/활용할 수 있는 음악/영화/주소록/메일/기타등등
      > 하드웨어: 공학적으로 최적화된 고성능 컴퓨터
      > 제품디자인: 감성적으로 마무리된 미니멀리즘 디자인

      ... 제 고민은, 이게 모두 UX라고 한다면 대체 UX라는 괴물의 정체가 뭐냐는 겁니다. 이상의 모든 부서(상품기획/양산/사업협력/디자인/운영)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회사 사장 외에, UX 디자이너라고 불릴만한 사람은 없는 거 아닐까요? 단지 이런저런 분야에 나름의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전문가라고 할 수 없으니까요.

      반대로 이 중에서 일부가 UX라고 정의한다면, 그게 기존의 "UI 디자이너"나 "상품기획자"의 업무와 뭐가 다른 걸까요. 일전에 이 블로그에서 기존의 업무영역이 아닌 UX를 찾기 위해서 진정성(authenticity)이나 여행 기획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적어도 아직은 "기존 UI에서 다루지 않던 UX"를 찾지 못했어요...

      이런 글은 인기 없는데... 이 블로그는 점점 망한 블로그가 되어 가는 듯. ㅎㅎ
  2. 2010.06.27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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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공감이 많이 가는 글이군요. 특히 첫 문단과, 끝부분의 밑줄 친 글들은 구구절절히 와 닿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로 드신 테스코의 '경제적' 만족감도 UX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럼 대체 UX가 뭔지보다는 UX가 아닌 건 뭘까를 생각하는 게 더 빠를 것 같기도 하고... 여러 모로 어려운 주제인 것 같습니다.
    • 2010.06.28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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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X 전문가들로부터 욕이라도 먹지 않을까 하고 있는데,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ㅁ;

      저도 예전 글( http://interaction.tistory.com/317 )에서 언급했지만, UX가 뭐냐?라고 하면 할말이 많다가도 그럼 뭐가 UX가 아니냐?는 질문에는 답하기가 어렵더라구요. 거기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그냥 뜬구름이죠. 그래서 구심점을 찾기 위한 고심을 하고는 있지만, 아직은 좀 더 고민과 시행착오가 필요할 듯합니다.
  3. olli
    2010.06.2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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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의 사용자는 일반 대중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을 말하는 건가요? 저 처럼 UX literacy가 낮은 사람들에겐(아니 심지어 poorly 하죠) UX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의 용어는 너무 어려워요. ㅠ.ㅠ 반대로 누구나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UX야 라는 것으로 정의하고 묶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적고 나서 보니, 그렇다면, '정의(또는 거창하게 말해서 진리)'란 없는거냐? 라고 누군가 이야기 할 수 있겠군요. ㅠ.ㅠ 에잇 몰라.흥.
    • 2010.06.29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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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가 정의되지 않았으니 literacy에 대해서 고민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글에서의 사용자도 그냥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지 특별히 일반 대중인지 아닌지를 고민하지 않았어요. 사용성이 단지 '목적 기능을 수행할 때의 인지적/신체적 효율성'이던 시절에는 모든 게 비교적 명쾌했지요... 워낙 디자이너들이 역사적으로 욕심이 많아서 그래요. ㅎㅎ
  4. 2010.06.29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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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앗. 댓글까지...... 그나저나 민우랑 박. 박. (ㅠ.ㅠ) 이름이 생각 안나. 흑. 흑. 다들 잘 있나욤?
    • 2010.06.30 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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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하 다들 잘 있습니다. 박모씨는 한국에 취직돼서 7월에 영구귀국해요. 자세한 이야기는 따로 기회될 때 말씀드리죠. :)
  5. 3141592
    2010.08.18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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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X라는 분야를 인간공학적 시각에 집중하기 보다
    "사람들에게 좋은 경험을 제공한다"라는 기본명제
    (User eXperience)에서 다시 시작해 보면 조금 해답이되지 않을까요? 좋은경험이란 스타벅스와 같은 감성적경험만 있는 게 아니라 싼가격이란 요소도 사람들에게 좋은 경험인데 UX하는 사람들이 먼저 '저렴한 제품을 찾는다'라는 경험을 폄하하지 않았나 싶네요.
    여하튼 UX가 모호하다는 것 자체가 맞는 것 같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2010.08.22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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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군요. 마케팅(가격 책정을 포함한)이야말로 고객경험의 첫번째 관문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호해요, 이 UX라는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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